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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마스터 척준경의 모든 것, 곡산검법 여진정벌 이자겸 말년

by 봄비담은 옹달샘 2023. 5. 10.

 한반도 최고의 애로우 마스터(궁술)가 이성계라면, 오늘은 한반도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소설같은 무력을 가지고 있는 척준경은, 지략 전략 전술이 아닌 오직 무력만으로 최고가 됐기에 소드마스터라고 불릴 만합니다. 하지만 여진정별부터 시작됐던 그의 오르막은 결국 역모로 마감되면서 안타까운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1. 소드 마스터 척준경의 곡산검법

 척준경은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를 통해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합니다. 곡산 척씨 가문의 검법인 곡산검법, 그 마지막 곡산검법의 전승자가 척사광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곡산검법이 어떤 검법인지를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수많은 전쟁에서 척준경에서 세운 공적을 보면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말과 사람을 동시에 베어버린다는 '마인참'이라는 필살기를 가지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척준경은 단신으로 적군에 뛰어들어 적장을 죽여서 전쟁의 승패를 바꾸고 돌아온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실제 그가 사용하는 검법은 다른 군사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경지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특히 여진족에게 척준경은 죽음의 사자와도 같은 공포였으며, 척준경의 등장만으로도 여진족의 장수들은 도망치기 바빴다고 합니다.

2. 여진 정벌

 척준경의 무위는 여진 정벌을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제 1차 여진 정벌을 통해 척준경은 무력을 인정받아 '천우위 녹사참군사'라는 벼슬을 받게 되지만, 괘씸죄에 걸려 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이 때 윤관이 척준경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곤경에서 구해주는데, 윤관과 함께 한 제2차 여진정벌을 통해 척준경은 천하무쌍의 무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 고려 예종이 부왕인 숙종의 뜻을 받들어 17만명이나 되는 대군을 2차 여진 정벌에 동원한 것입니다. 석성 전투, 가한목 전투, 영주성 전투, 공험진 전투, 웅주성 전투, 길주 전투 등을 통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척준경은 지략이 아닌 순수한 무력으로 홀로 적진에 뛰어들거나 100명 정도의 소수 결사대를 데리고 적진을 돌파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돌파를 뚫어내어 적장의 목을 취하고 전쟁을 승리로 바꿔놓은 것은 오직 척준경 본인의 무력 때문입니다. 척준경은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에 처한 총사령관 윤관을 구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척준경은 고려를 대표하는 무인의 반열에 섰고, 고려말/조선초에 장수 이성계와 비견되기도 합니다.

3. 이자겸

 여진 정벌 후 따르던 부자의 연까지 맺었던 윤관이 세상을 떠나고, 척준경은 이자겸에게 몸을 의탁하게 됩니다. 하지만 금나라와 싸울 것이 아니라 조공을 주고 관계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하여 문신들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후 인종 4년 때 모시던 상관인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인종을 사실상 구금하고 실권을 장악합니다. 내정은 이자겸이, 군권은 척준경이 쥐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점점 벌어지게 되자, 인종은 재빨리 척준경을 회유했고 척준경은 결국 인종의 뜻을 받들어 이자겸을 몰아내게 됩니다. 아무런 힘이 없이 목숨의 위기까지 왔던 인종은 척준경으로 인해 극적인 왕권 회복에 성공하게 됩니다. 인종은 척준경을 신하 중 최고 서열인 문하시중에 임명하려 하지만, 척준경의 사양으로 '위사공신'을 삼고 '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합니다. 이자겸은 전라도 영광으로 귀양을 갔고 그 곳에서 사약을 받아 죽게 됩니다. 

4. 말년

 꽃길만 펼쳐질 것 같았던 척준경에게도 고난이 찾아옵니다. 비록 이자겸을 물리쳐 왕위를 보존하긴 했지만, 척준경 또한 이자겸 일파로써 함께 권세를 누려왔던 원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지상, 김안 등이 척준경의 죄를 물어 탄핵 상소문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인조도 척준경에게 죄를 물어 전라남도 신안의 엄타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이자겸과 달리 척준경은 순순히 귀양길에 오릅니다. 무신들의 롤모델이었던 척준경의 몰락으로 인해 많은 무신들이 차별을 당하게 되고, 이는 문신 중심의 정치가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훗날 '무신정변'이라 불리는 역사적 대사건은 이런 무신에 대한 차별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1128년 인종은 척준경의 공도 인정해야 한다며 고향인 곡주로 척준경을 옮기게 하고, 가족들과 함께 살게 하였습니다. 척준경의 아들에게도 직전(밭)을 돌려주고, 결국 척준경을 사면하여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라는 벼슬까지 주었습니다. 하지만 명예와 벼슬을 일부 회복했지만, 여전히 '역모에 가담한 신하'라는 오명을 벗을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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